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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KDO 대한민국 울르동 동남쪽 87.4km 해상에 위치한 민족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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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1동해는 서쪽으로 한국, 동남쪽으로 일본과 태평양, 북쪽과 동쪽으로 러시아와 태평양에 둘러싸인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바다이다. 이 넓은 동해 바다에 독도가 자리 잡고 있다.

독도에 최근 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부터이며, 울릉도는 훨씬 오래되어 기원전 1세기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독도는 우산국이라는 이름으로 512년에 공식적인 문헌에 등장한다. 독도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울릉도 또는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우리의 생활권, 어업권, 교통권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강진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강진 사람들의 생활상을 시로 남겼다. 그중 ‘탐진어가(耽津漁歌)’라는 시 속에는 한반도 남서 해안에 위치한 바닷가 사람들이 홍합을 캐러 울릉도까지 드나드는 모습이 다음과 같이 담겨 있다.

漁家都喫絡蹄羹 어촌에서 모두가 낙지국을 즐겨먹고
不數紅鰕與綠? 붉은 새우 녹색 맛살은 쳐 주지 않네
澹菜憎如蓮子小 홍합이 연밥같이 작은 게 싫어서
治帆東向鬱陵行 돛을 달고 동으로 울릉도로 간다네

위 글귀는 15세기에 시작된 조선 정부의 주민쇄환정책에 따라 당시에는 영구 거주자가 없었으나, 전라도 강진의 주민들이 돛단배를 이용해 일상적으로 울릉도에 가서 어로 작업을 했음을 보여 준다. 강진은 전라도에서도 서남단에 위치한 곳이다. 한반도 서남단의 어부들이 일상적으로 울릉도까지 다녔다면, 울릉도와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경상도와 강원도 연해 지역 사람들도 당연히 울릉도를 왕래했을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근해의 동해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곳으로 어족이 풍부해 어민들에게는 중요한 생활 터전이었다. 본토에서 울릉도를 왕래한 사람들의 목적에는 어로 작업뿐만 아니라, 약초 캐기, 벌목 등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연해 지역 사람들만 왕래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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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지리적 사실은 울릉도와 독도가 서로 바라보인다는 점이다[1].1 역시 독도에서도 울릉도는 잘 보인다(사진 2-1, 2-2). 서로 보인다는 지리적 인접성과 접근성은 울릉도에 주민이 거주하면서부터 독도의 존재를 인식했음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증거이다.


[1] 정태만(2008)의 연구에 의하면 독도는 울릉도에서 87.4km의 거리에 있으며, 맑은 날 울릉도에서 고도 86m 이상의 지역에서 보인다고 한다.

독도를 둘러싼 쟁점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점은 ‘독도’라는 지명과 관련된 내용이다. ‘독도’라는 명칭은 1906년부터 한국의 공식 문헌에 보이기 때문이다. 1906년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 기록된 ‘본군 소속 독도’라는 표현이 현재까지 확인된 최초의 문헌 자료이다. 같은 해 4월에 황현의 『매천야록』에 독도라는 표현이 보인다.

19세기 말까지 독도는 한국 문헌과 고지도에 ‘우산도’, ‘자산도’, ‘삼봉도’, ‘천산도’, ‘간산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우산도’였으며, 다른 이름들은 별칭이었다. 그러므로 과거 문헌과 지도에 빈번히 등장하는 ‘우산도’가 지금의 독도인가 하는 문제는 독도를 둘러싼 역사지리적 쟁점 가운데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한국은 1900년 10월에 반포한 대한제국 칙령 41호를 근대적인 의미에서 독도를 한국이 명확하게 관할했던 법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령에는 ‘우산도’나 ‘독도’라는 표현 대신에 ‘석도’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은 ‘석도’가 독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한국은 ‘석도’가 지금의 독도인 것이 명백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독도 지명을 둘러싼 첫 번째 쟁점은 1906년 이전에 한국 문헌과 지도에 빈번하게 기록된 우산도가 독도인가 하는 문제이다. 다음의 쟁점은 독도가 울릉도 일대에 있었던 고대 소국인 ‘우산국’에 포함되는가의 문제이다.

우산국·우산도와 독도

『삼국사기』에 512년의 우산국에 관한 기록이 실린 후 고려 시대에 울릉도와 독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우릉도(芋陵島, 930), 우산국(于山國, 1018, 1019, 1022), 우릉(羽陵, 1032), 울릉도(1141, 1157, 1273) 등의 표현이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무릉도(1416), 우산도(1417), 우산도와 무릉도(1454), 삼봉도(1476), 무릉도와 삼봉도(1511) 등의 명칭이 문헌에 보인다.

서계 박세당(朴世堂, 1629~1703년)의 『서계잡록』에는 「울릉도」라는 글이 실려 있다. 박세당은 이 글에서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해기(海氣)가 맑지 않거나(울릉도의)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기술하였다.[45] 울릉도 부근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 높이 올라가야 보이거나, 날씨가 맑은 날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섬은 지금의 독도 이외에는 없다. 따라서 독도를 당시에 우산도로 불렀음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삼척첨사 장한상(張漢相, 1656~1724년)은 안용복 사건 직후인 1694년 9월 19일부터 10월 3일까지 울릉도를 수토(搜討)한 후 「울릉도사적(蔚陵島事蹟)」을 기록하였다. 장한상의 「울릉도사적」에는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술이 있다. 그런데 장한상과 동시대 인물인 박세당의 울릉도 관련 기록을 비교하면, 장한상이 말한 동남쪽의 섬은 우산도 즉 독도임이 분명해 진다. 장한상이 섬의 크기가 울릉도의 삼분의 일이 안 된다고 본 데는 오차가 있지만, 바다 멀리 바라볼 때 동남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섬을 말하고 있어 이 섬이 오늘날의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46]

17세기까지 때로 혼란도 있었던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나 지명이 17세기 후반 안용복 사건과 이 사건으로 인한 울릉도에 대한 관심의 증가 및 사건에 대한 기록 등으로 위치, 명칭 등이 정확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암 신경준(1712~1781년)은 18세기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이다.[47] 신경준은 『강계고』에서 그동안 일부 혼란이 있었던 우산과 울릉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정리하였다.

  •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한 섬이라고 하나, 여러 도지(圖志)를 살펴보면 두 섬이다. 하나는 일본인이 말하는 송도(松島)이다.’고 했으니, 두 섬은 모두 우산국이다.”[48]
신경준은 지리지인 『여지지』를 인용해, 우산도와 울릉도는 두 개의 별도의 섬이며 두 섬 모두 고대의 우산국에 속한 섬이고, 우산도는 일본인이 ‘송도’로 부르는 섬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였다.

왕명에 따라 국가적 사업으로 편찬했으며, 조선 고금의 문물제도를 종합한 『동국문헌비고』(100권 40책, 1770)의 여지고에는 “울릉·우산이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도는 왜가 말하는 소위 송도이다.”라고 더욱 분명하게 두 섬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다시 19세기의 중요한 역사지리서인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1823)를 보완한 속편인 『해동역사속(海東繹史續)』, 일명 ‘해동역사지리고(海東繹史地理考)’에도 수록되었다.[49]

뿐만 아니라 역시 왕명에 의해 편찬되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의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들이 집약된 『만기요람(萬機要覽)』(1808) 군정 편에도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땅이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이다.”[50]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의 국가와 관료, 지식인들의 인식을 보여 주며, 국가의 공식 입장을 정리한 기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고종황제의 칙명에 따라 조선의 문화와 제도를 모아 16고(考) 250권으로 종합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 여지고에는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영토[于山國地]인데 우산은 곧 왜가 말하는 바의 송도(松島)이다.”[51]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일본에 병합되기 직전의 대한제국의 공식 입장을 분명히 한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즉 울릉도와 우산도가 별개의 섬이며, 두 섬은 모두 옛 우산국의 영토였다는 점, 우산도가 일본이 말하는 송도 즉 지금의 독도라는 사실을 국가 차원에서 확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석도와 독도

독도 지명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쟁점이 ‘석도’가 지금의 ‘독도’인가 하는 점이다. 대한제국은 일본인들의 끊임없는 울릉도 불법 입국을 방지하는 적극적 대책의 일환으로 지방행정체계를 개편하여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를 제정 반포해서 종래 강원도 울진군에 속했던 울릉도를 ‘울도군(鬱島郡)’으로 승격시키고,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정하였다. 울도군이 관할하는 구역은 울릉도·죽도(지금의 죽도)와 석도(石島, 지금의 독도)로 하였다.[52] 그리고 이 관제 개정을 중앙 『관보』에 게재하여 공포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공인받을 수 있는 제도적 절차를 마무리하였다.

석도가 독도와 동일한 섬이라는 논리는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할 때 빈번히 발생하는 한국어의 표기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석도’의 어원이 지방 사투리와 관계있다고 하는 논리는 1953년에 한·일 양국이 왕복 문서를 주고받던 단계에 이미 보인다. 그리고 동시대에 신석호, 이병도, 최남선 등 독도 연구를 하고 있던 한국 학자들은 ‘석도’, ‘독도’ 호칭이 ‘돌섬’, ‘독섬’ 등의 말과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언급해 왔다. 일본 학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조선어 방언 연구(1944)로 전라도 방언에서 ‘돌’을 ‘독’으로 부른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한국지명총람』에도 ‘돌’을 ‘석(石)’으로 의역하여 표기한 지명의 예가 제시되어 있다. 이들 선행 연구는 ‘석도=독도’설의 근거로 제시되어 온 이래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연구에서 그 논거가 되고 있다.[53]

울릉도를 왕래하던 사람들은 주로 어부나 약재상들이었으며, 이들은 토박이 우리말로 지명을 불렀다. 문헌에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지 잘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지역 사람들이 부르는 한글 지명을 사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는 지역민들이 부르는 한글 지명과, 문서나 문헌에 표기되는 지명이 다른 경우가 매우 많다. 독도를 왕래하던 삼남 지방 바닷가의 사람들은 바위와 돌로 이루어진 이 섬을 ‘돌섬’ 또는 ‘독섬’이라 불렀다. ‘돌섬’ 또는 ‘독섬’을 한자로 표기할 때 훈차(訓借)해 뜻을 가져와 표기하면 ‘석도(石島)’가 된다. 또한 이를 음차(音借)해 음을 가져다 표기하면 ‘독도(獨島)’가 되므로, 독도와 석도는 같은 말인 것이다.>

칙령을 반포하기 직전인 1900년 6월 초에 울릉도 시찰위원 우용정이 울릉도를 조사하였다. 이 조사 때 우용정은 울릉도에 이주한 사람들이 바라보이는 바위섬을 돌섬이라고 부르는 것을 목격하고, ‘돌섬’이라는 우리말 호칭을 자연스럽게 ‘석도’라고 한자로 표기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도 울릉도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으로 부르고 있다. 1900년 당시 우용정이 현지 조사에서 수집된 내용을 반영하여 독섬 내지 돌섬을 석도로 한역(漢譯)하였고, 이 호칭이 관제 편성에 반영된 것[54]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 널리 쓰이고 있는 독도라는 명칭이 처음 우리나라의 공식 문서에 등장한 것은 1906년 심흥택 울도군수의 보고서이다. 그러나 ‘독도’라는 지명이 현지를 왕래하던 주민들이 이전부터 사용하던 이름임을 알려주는 일본측 기록이 있다. 1904년 일본 군함 니이타카(新高)호의 기록에 “리앙크루도 암(岩), 실제로 본 자에게 들은 이야기로서 한국인[韓人]들은 이것을 독도(獨島)라고 쓴다.”[55]는 기록이다. 이로 보면 우리말 지명인 ‘독섬’ 또는 ‘돌섬’이라는 호칭이 이 지역을 조사한 외국인에게도 알려져 있을 정도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형태의 이름들이 제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45] 유미림, 2008a, “‘우산도=독도’ 설 입증을 위한 논고: 박세당의 「울릉도」와 장한상의 「울릉도 사적」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29(2), 92.
“盖二島去此不甚遠一飄風可至 于山島勢卑不因海氣極淸朗不登最高頂 則不可見鬱陵稍峻”(「울릉도」)
[46] 유미림, 2008a, 전게서, 87~92.
[47] 양보경, 1992, “申景濬의 『山水考』와 『山經表』 - 국토의 산천에 대한 체계적 이해 -”, 『토지연구』 3(3), 한국토지개발공사, 135~145.
박인호, 1996, 조선후기 역사지리학 연구, 이회.
양보경, 2001, “신경준의 지리사상”, 『공간이론의 사상가들』, 국토연구원 엮음, 한울, 549~561.
[48] 愚按輿地志云 一說于山鬱陵本一島 而考諸圖志二島也 一則所謂松島 而盖二島俱是于山國也.
[49] 文獻備考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島卽倭所謂松島也.
문헌비고에 울릉 우산이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도는 왜가 말하는 소위 송도이다라 하였다.
[50] 『萬機要覽』 軍政篇 海防 東海,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
[51] 『增補文獻備考』 「輿地考」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
[52] 勅令第四一號 ‘鬱陵島를 鬱島로 改稱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한 件’.
第一條 鬱陵島를 鬱島라 改稱하야 江原道에 附屬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하야 官制中에 編入하고 郡等은 五等으로 할 事第二條 郡廳位置는 台霞洞으로 定하고 區域은 鬱陵全島와 竹島石島를 管轄할 事
[53] 신용하, 1996, 전게서; 유미림, 2008b, “일본의 ‘석도=독도’설 부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해양정책연구』, 23(1), 한국해양수산개발원, 175. 신석호는 1948년에 “독도 소속에 대하여”(「史海」, 「신석호 전집」 수록)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독도의 내력”(「사상계」 1960)에서도 돌섬을 언급하고 있다.
[54] 송병기, 2007, 『울릉도와 독도』, 단국대출판부, 196.
[55] 유미림, 2008b, 전게서, 195.
堀和生, 1987, “1905年日本の竹島領土編入”, 『朝鮮史硏究?論文集』 24, 111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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